2014년 11월 29일 토요일

31. 인생의 세번 기회

제 나이는 40대 중반입니다. 제가 30대 일 때는 40대 중반 어른들을 보면 많이 늙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40대 중반을 살아보니, 지금이 인생의 가장 황금기라고 생각됩니다.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회사건 다른 조직이건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40대 중반입니다.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보내려고 합니다.

40대 중반 나이인 제가 이런 얘기하면 인생의 선배들이 뭐라고 할 것 같긴 하지만, 제 나이에도 돌아켜보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이 인생 얘기 한다고 욕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욕 하십시오. 저는 제 얘기 해야 하겠습니다.

제 인생에도 크게 세 번의 기회가 왔다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중 첫번째 기회는 2000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정신과 전공의 2년차, 30대 초반, 총각이었던 저는, 주말이면 클럽프렌즈라는 회사에서 주최하는 파티장에 놀러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스펙좋은 괜찮은 아가씨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현재 제 와이프도 그 곳에서 만났습니다.

클럽프렌즈 파티장에 가서 아가씨들을 만나는 것도 괜찮은 재미였지만, 또 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괜찮은 아가씨들을 만나기 위해 잘나가는 벤처 기업가들이 몰려 들었고, 저는 그 분들과 인맥을 쌓으면서, 비즈니스 세계에 눈을 뜨게되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초창기 벤처 1세대 스타 기업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회사를 꽤 괜찮은 가격을 받고 다른 회사에 넘긴 상태였습니다. 당시로써는 젊은 나이에 큰 돈을 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고 계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돈을 많이 번 그분은 저에게 많은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제가 돈 벌고 싶어하고, 주식에도 관심이 많은 것을 안 그 분은 저에게 제안을 하셨습니다.

"돈 벌고 싶지? 내가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까?"

"뭔데요?"

"네이버 주식이 좀 있는데 일부 처분했으면 하는데, 니가 한 2000만원어치 인수해라."

"왜 저에게 팔려고 하시죠?"

"그냥 네가 돈 벌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내가 가진 것 전부 파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파는 거야."

당시 우리나라 검색 시장은 춘추 전국 시대였습니다. 야후, 알타비스타, 다음, 라이코스, 한미르 등 쟁쟁한 회사들이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후가 단연 독보적이었고, 다음과 라이코스가 잘나가는 편이었으며, 한미르는 당시 지도 서비스를 최초로 내놓으면서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치고 나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신생회사인 네이버는 별다른 내 놓을 것이 없는 듯 했습니다. IT 비즈니스에 문외한인 제 눈에도 네이버 싸이트는 초라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림 1] 초기 네이버 화면



저는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네이버 주식이 뜬다는 거죠?"

"응. 네이버 잘 할 거야."

"수많은 싸이트가 있는데 그 중 네이버가 왜 뜬다는 거죠?"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멤버들이 괜찮은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저는 안 산다고 했습니다. 회사의 성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멤버들"이라는 사실이 당시 저에게는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혜였습니다. 상장되기 전 네이버 주식을 그 때 샀더라면, 지금 쯤 그 자산가치는 50억원 정도 할 것 같습니다. 그랬더라면 제 삶은 많이 달라졌을까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주식을 샀더라도, 아마도 제 성격 상, 상장되자마자 1,2억원 정도 되었을 때 팔아치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계속 상승하는 네이버 주식을 보면서 "괜히 팔았다." 후회하며 살았을지도 모르지요.

두번째 기회는 2004년 MBA 1학년 시절이었습니다. MBA 1학년을 마치면, 학생들은 여름방학동안 섬머 인턴으로 회사에 3개월 정도 취업해서 일을 합니다. 섬머 인턴을 좋은 회사에서 하는 것은 졸업반 때 취업할 때 매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머 인턴 자리를 찾는 좝서치는 1학년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비즈니스 경험이 전무한 상태로, 의사만 하다가 MBA 학교에 입학한 저로써는 서머 인턴 자리를 찾는 것에 너무 애를 먹었습니다. 가고 싶었던 컨설팅 회사들은 최종 면접까지 갔다가 줄줄이 떨어졌습니다. 미국 제약회사들은 미국 시민권이 없으면 좀처럼 들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McKinsey, Bain, BCG, Lehman Brothers, Goldman Sachs Eli Lilly, Johnson & Johnson, P&G, Unilever, HCG Healthcare, Dupont 등등 신문으로만 보아왔던 회사들과 원없이 인터뷰를 하긴 했는데, 결국 오퍼는 받지 못하고 다 떨어졌습니다.

당시 한 30군데 정도 회사에 시도를 했다가 떨어진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많이 거절 당하는 경험을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상황이었습니다. 떨어지는 것도 속상했지만, 쪽팔리는 것도 큰 문제인 상황이었습니다. 의대 동기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가족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MBA 를 억지로 고집 피워서 왔습니다. 그냥 섬머 인턴도 못 하고 한국 들어가서 놀면서 여름방학 3개월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도 쪽팔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왠만한 사람이 인생의 밑바닥에 내려가서 수주일에서 수개월 잠 못자고 처절하게 고민하다 보면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저에게 갑자기 생각이 난 곳은 WHO 였습니다. 거기서 돈 안받고라도 인턴을 하면 이력서에 올리기 좋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섬머 인턴이라는 것이 그 곳에 영원히 취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2학년 졸업반 때 취업할 때 유리한 내용을 이력서에 적기 위함입니다. 이력서에 World Health Organization 이라고 써 넣는 것은 누가 봐도 괜찮은 이력일 것 같았습니다. 당시 WHO 사무총장님은 한국인이자, 서울의대 선배이신 이종욱 박사님이셨습니다. 웹싸이트를 뒤져보니, 다행히 이종욱 박사님 이메일 주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메일을 썼습니다.

"나는 서울의대 출신입니다. 이종욱 박사님 후배입니다. 큰 뜻을 품고 비즈니스를 공부하러 MBA 학교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세계 보건 정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종욱 박사님을 항상 존경해왔습니다. 이번에 MBA 1학년을 마치고 여름방학 동안 WHO 에서 섬머 인턴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세계 보건 정책에 기여하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등등 마음에 없는 내용이라도 정성들여 써 내려가다 보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메일 내용은 완전한 거짓은 아닙니다. 내 마음 한 편에는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신기하게도 하루가 지난 다음 "UN 산하기구인 WHO 사무총장님"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한글로 메일을 보냈는데 영어로 답이 왔습니다. 역시 WHO 사무총장은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일개 학생에 쓴 메일에 답장을 보내시더군요.

"JiSoo, I'm very impressed with your passion."

음... 내 열정에 감동을 받았다니, 시작은 좋았습니다. 여러가지 얘기가 적혀있었는데, 마지막 문장이 저를 급 실망시켰습니다.

"I recommend you to join WHO with your own effort."

'너 스스로의 힘으로 WHO 에 들어오길 조언한다. 윽... 안 도와주시겠다는 뜻이구만. 역시 UN 산하기구의 사무총장님 쯤 되니, 사적인 인맥 같은 것은 거절하시는 군.'
섭섭한 마음이 물밀듯 몰려왔습니다. 괜한 청탁을 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날 또 한번 좌절한 마음으로, MBA 학교에 같이 다니던 영욱 형님에게 전화해서 술마시며 위로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이 같이 퍼 마셨습니다.

제법 취한 상태로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에 다시 이메일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이종욱 박사님의 메일을 읽고 또 읽어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다 보니 한 부분이 저의 눈길을 붙잡았습니다.

"CC: Yong Kim"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시면서, Yong Kim 이라는 분에게 참조를 넣은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보니 한국인이신 듯 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것 저것 가리면서 체면치레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거절당한다는 것이 한 5번 받아볼 때까지는 횟수에 비례해서 아픕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는 맺집이 생겨서 별로 안아픕니다. 10번이건 30번이건 거절 받는 것은 똑같습니다.

Yong Kim 이라는 분에게 "나 이런 사람인데, WHO 에서 인턴을 하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보내고 나서 30분 정도 지났을까?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스위스 바젤에서 Yong Kim 이 직접 전화를 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용이라고 합니다. 이종욱 박사님이 배지수 씨 WHO 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매우 친화력 있는 분이셨습니다. 한시간 가량 통화를 했는데, WHO 에 오면 너에게 참 좋을 거라는 얘기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여권은 짙은 녹색인데, 우리는 붉은 색의 UN 이 발행한 여권을 가지고 다닌다. 이 여권만 가지고 있으면 모든 공항에서 세관을 거치지 않고 그냥 통과한다. 맘만 먹으면 밀수도 할 수 있다. 짭짤하다. 
  • UN 에서 근무하면 봉급은 미국 공무원 수준에 준해서 받는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금을 안낸다. 그게 짭짤한 거다. 
엄청 친화력있으신 분이신 듯 했습니다. 이런말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농담을 하시면서, 지극히 사소한 내용들까지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진행하고 있을 무렵, 기존에 원서를 넣어두었던 삼성생명에서 인턴 오퍼가 왔습니다. 삼성생명과 WHO 두군데 좝 오퍼를 받고, 어디로 가는게 좋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주변에 조언도 구했습니다. WHO 가 이력서에 적기에 뽀대는 나지만, 기왕에 비즈니스 쪽으로 커리어를 가져가고 싶으면 회사 경험을 하는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결국 삼성생명에서 인턴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수년이 지난 뒤, 아이비리그 다트머스대학교 총장으로 김용박사가 부임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들었습니다. 이름이 익숙해 찾아보니, WHO 에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던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전화받을 당시에는 그렇게 대단한 분이신지 몰랐었습니다. 그냥 WHO 에서 이종욱 박사님 밑에 계신 분이시겠거니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세계적인 엄청난 인물이셨습니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년이 지나서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세계은행 총재로 지명되셨습니다.

제가 그런 분하고 직접 통화를 했다니, 그리고 그 분이 저에게 그렇게 친밀하게 농담을 건네시면서 좝 오퍼를 하셨다니. 그런데 문제는 그 순간에 그게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몰랐다니.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그 때 김용 박사님의 제안을 받아 WHO 로 갔었더라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WHO 갔더라도 일을 잘 못해서 김용 박사님 눈밖에 나고, 일이 꼬였을 수도 있었겠지요.

세번째 기회는 제약회사 머크에서 근무할 때 입니다. 
당시 저는 대회협력이사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머크 한국 사장님은 마크 팀니라는 분이셨습니다. 영국인이고 호주에서 성장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머크에 입사하기 전, Bain 이라는 컨설팅 회사에서 2년간 빡빡 굴르면서 일하는 법을 배웠고 한창 물이 올라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컨설팅 회사에서 배운 기술은 사장님 입장에서는 써먹기 참 좋은 기술입니다. 당시 사장님은 머크 전 세계를 총괄하는 회장님에게 한국 비즈니스 현황을 보고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 자료 준비를 컨설턴트 출신인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머크는 직원들의 라이프가 참 좋은 회사입니다. 직원들은 5시가 되면 다 퇴근하고 회사는 텅 비게 됩니다. 반면 저는 컨설팅 회사에서 멘날 새벽 2시, 4시 퇴근하던 습관이 붙어 있기도 했고, 머크에 새로 취업한지 얼마안되는 상황에서 사장님 눈에 들어 인정받고 싶은 의욕이 철철 넘치던 때였습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몸바쳐 일하는 직원이 사장님이 볼 때 이뻐 보일 수 밖에 없었을 듯 합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어떻게 그런 체력과 열정이 있었나 싶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못할 것 같습니다. 여하간 그렇게 몸바쳐 충성한 결과 사장님 눈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부터 회사에 취업하고 있기 보다는 내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일년 정도 지내다가, 사표를 들고 사장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당시 사장님이 저에게 제안을 하셨습니다. 

"회사 생활이 재미가 없나? 돈이 필요하나? 이해는 한다. 근데 내가 제안을 하나 하자. 내가 곧 자리를 옮길 것이다. 아직 발령이 나기 전이니 말을 해 줄 수는 없지만, 같이 데리고 가겠다. 조금만 참아라. 그 곳은 너도 흥미를 느낄만한 곳일 것이고, 네 커리어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모호한 약속을 어떻게 믿어. 그 때 가봐야 아는거지."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난 시점에 마크 팀니 사장님은 일본 사장으로 부임을 했습니다. 일본 사장은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비즈니스의 거의 10배에 해당되는 큰 규모의 시장의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2년이 지나 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마크 팀니 사장님은 미국 사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머크 전 세계의 조직에서 명실공히 회장님 다음의 2인자가 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크게 될 분을 그 때 몰라봤습니다. 당시 좀 참고 있다가, 일본에 따라갔었더라면, 그리고 열심히 충성해서 심복이 되었더라면, 지금쯤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또 모르죠. 일본 따라갔는데, 일을 잘 못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죠. 

돌이켜 보니 제 인생에 세 번 큰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회를 그 순간에는 못 알아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항상 지나고 나서 "그 때가 기회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인생의 기회는 세번만 오는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온 기회를 잘 잡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두가지 후회를 하고 산다고 합니다. "어떤 선택의 상황에서 하지 않고 지나간 다음 그 때 그걸 했었어야 하는데." 라고 후회하기도 하고, "무엇인가 하고 나서 괜히 했다." 라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많은 친구들은 자기가 사업을 하면 잘 할 것 같다,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도전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를 합니다.
"그 때 사업을 시작했었어야 하는데."
전자의 후회하는 사람들입니다. 전자의 후회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안정적으로 살아갑니다.

사업을 과감하게 시작하면, 처음의 생각대로 사업이 굴러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성공한 사업가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누구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일어서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왜 내가 이 짓을 시작했지?"
처절하게 후회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후회하는 사람들은 도전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전을 하기 때문에 인생의 대박을 터뜨릴 수 있습니다. 반면 쪽박 찰 수도 있습니다. 스릴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위에 제가 인생의 기회를 놓인 사례를 소개한 세가지 케이스는 "그 때 했었어야 하는데 괜히 안했다."라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영위하다 순간순간 "내가 왜 이 짓을 시작했지?" 생각이 듧니다. 골치가 아프고 머리가 새고, 주름이 늘어갑니다. 후자의 후회입니다. 그러나 저는 후자의 후회를 하는 제 모습이 전자의 후회를 하는 제 모습보다 좋습니다. 골치아픈 일이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사업을 하는 저의 모습이 좋기 때문입니다.

기회는 수시로 나를 찾아오고, 또 떠나가곤 합니다. 지금도 제 앞에 기회들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참 어려운 것은 지금 해야 할 의사결정들이 기회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냥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기회를 잡는 방법인 듯 합니다. 또 순간 순간 상황에서 과감한 리스크테이킹을 하는 것도 기회를 잡는 방법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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